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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횡재세'와 '기부금' 논쟁···국제그룹이 생각나는 이유

오피니언 데스크 칼럼 차재서의 뱅크업

'횡재세'와 '기부금' 논쟁···국제그룹이 생각나는 이유

등록 2023.12.07 08:26

차재서

  기자

reporter
12·12 군사 반란 사태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 흥행과 맞물려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로 유명한 국제그룹이 다시 생각나는 요즘이다. 한때 22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7위 반열에 올랐으나 군사정권의 손을 타면서 순식간에 공중 분해된 비운의 기업.

명목은 무리한 사세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이었지만, 그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결정적인 이유는 전두환 정부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었다. 국제그룹이 부담하는 정치자금이 타 기업에 비해 눈에 띄게 적다는 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정권은 총선까지 참패하자 제일은행 등 채권단을 전면에 내세워 이들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서울의 봄'을 마주하며 국제그룹 해체 사태를 떠올린 것은 당시의 상황과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금융회사에 희생을 요구하는 현 국면에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있어서다. 현실 세계와 오버랩되는 '기시감'이 개봉 2주 만에 5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흥행 원동력이란 평가처럼 말이다.

정부는 연일 업권을 불러세워 '상생'에 동참하라는 주문을 이어가고 있다. 어려운 시기 취약계층의 고통을 덜어줄 실질적인 지원 방안을 '자율적'으로 수립해 실행에 옮겨달라는 게 메시지의 골자다.

이에 주요 금융그룹은 2조원 규모의 기금 조성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당기순이익을 기준으로 회사별 차등을 둬 재원을 투입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액수를 특정하지 않았음에도 '2조원'이란 숫자가 나온 것은 야당이 입법을 추진 중인 '횡재세'와 무관치 않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은행 초과수익의 최대 40%를 '상생 금융 기여금'으로 부담하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2023년 회계연도부터 이를 적용하면 은행권에서 약 1조9000억원의 기여금이 모일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따라서 금융회사가 스스로 그보다 많은 금액을 내놓음으로써 횡재세 여론을 잠재우라는 게 정부의 숨은 뜻이다. "입법 형식으로 접근하는 게 적절한지에 우려가 있다"거나 "국회에서 최소 이 정도를 바란다는 것을 금융그룹도 인식하고 있다"는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발언에서도 이러한 기조를 감지할 수 있다. 표심이 필요한 만큼 민생을 생각하고 정국을 주도하는 쪽은 정부와 여당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금융권의 표정은 어둡다. 연초부터 '상생 금융 플랜'을 통해 전세대출 금리를 내리고 기업에 신규 자금을 투입해 왔음에도 노력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해 막대한 비용 부담까지 짊어지게 돼서다.

하지만 어느 하나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곳은 없다. 행여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까 하는 염려에 풍자 섞인 농담조차 삼간 채 숨죽여 정부의 제스처에 초점을 맞춰 신속히 움직이는 모양새다.

일종의 학습효과로 비친다. 정권의 타깃이 됐다간 과거 국제그룹처럼 조직이 산산조각 날 수 있다는 우려에 행동을 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친정부 인사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 금융그룹 CEO나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질 위기에 놓인 관료의 모습을 이미 금융권은 목도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혁신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다가 정부에 낙인찍혀 내리막을 걷는 모 IT 기업도 있다.

그만큼 정부의 압박은 거셌다. '이자 장사'와 '종노릇', 주식회사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든 '주인 없는 기업' 등 강도 높은 발언이 연거푸 쏟아졌고, 이를 견뎌내지 못한 금융권은 끝내 백기를 들었다.

사실 '세금'이냐 '기부금'이냐가 그리 중요한 논쟁거리일까 싶다. 어찌 됐든 금융사로서는 기꺼이 곳간 문을 열 수밖에 없다. 그 대신 기업가치 개선이든 신사업 투자든 인수합병(M&A)이든 리스크 관리든 내일을 위한 계획 중 적어도 하나는 접어야 한다. 정부와 국회의 체면을 살려줌으로써 공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이 바로 모두가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물론 금융권이 상부상조의 정신을 발휘해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금이 과거처럼 몇몇 권력자를 위해 허투루 쓰이지 않을 것이라 일단 믿고 있다.

다만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금융사부터 두드리는 정부의 진부하고 고압적인 태도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솔루션을 내놓은 위정자도 과연 급한 불을 끄는 데 급급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훗날 금융권의 '상생' 행보가 국제그룹 해체 사태와 같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재평가받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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