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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테마 에세이|<바가바드기타>] ⑳ 제1권 35행-37행

“당신은 안일(安逸)하십니까?”

하루는 안개가 가져다주는 새벽으로 시작한다. 먼 산은 마음대로 유영하는 안개로 포위되어 있다. 안개는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라고 독촉한다. 새벽은 하루를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살아보라는 독려하는 신의 부탁이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의 연장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내일의 준비다. 만일 오늘이 어제의 반복이라면, 그것은 진부陳腐하다. 사람들은 우연히 생긴 고깃덩이와 같은 돈, 명성, 그리고 권력을 자신의 계급장이라 여기고,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자랑한다. 그것은 행운의 여신이 배분하라고 맡긴 물건인 줄 모르고 혼자 차지하려고 머리를 쓴다. 그런 사람은 ‘진부’하다. ‘진부한 사람’은 陳腐라는 한자가 알려주듯이, 혼자 차지하려는 ‘썩은 고기’(腐)가 자신의 몸에 배어 악취가 풍기는 줄도 모르고, 자랑하는(陳) 어리석음이다.

아르주나가 그런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가 친척과 전투를 벌여 그들을 전멸시켜야 하는 난처한 처리에 걸려들었다. 자신의 일부인 친족, 카우바라 군대와 전쟁을 치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차를 모는 크리슈나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한다. <바가바드기타> 1권 35-37행은 아르주나의 델렘마를 자세히 설명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전투에 관한 은유다. 아르주나가 자신의 친척인 카우바라 군대의 대결을 주저하는 행위를 ‘연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해석은 이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해석할 때, 생기는 오류다. 아르주나의 주저는, ‘연민’이 아니라 ‘집착’이다. 인생이라는 수련도장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와 의연하게 결별해야 한다. 그 결별이 어려운 이유는, ‘과거의 나’는 역설적으로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만든 바탕이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일부인 카우바라 군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는 크리슈나에게 <바가바드기타> 제1권 35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tān na hantum icchāmi
에탄 나 한툼 이차미
ghnato ’pi madhusūdana
그나토 아피 마누수다나api trailokya-rājyasya
아피 트라이로크야-라즈야스야
hetoḥ kiṁ nu mahī-kṛte
헤토흐 킴 누 마히크리테

(직역)
“저는 그들을 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를) 살해하려는 그들을, 오 악마 마두의 살해자여!
심지어 세 가지 세상을 통치해도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을 위해서도, 더욱 그렇습니다.”

(번역)
“저 앞에 진열하여 우리와 전투를 벌이려는 그들을 저는 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살해하기 위해 준비한다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오, 악마 마두의 살해자인 크리슈나여!
심지어 세 가지 세상들, 즉 신들이 거주하는 ‘극락’, 새들이 나는 ‘대기’, 그리고 인간이 거주하는 ‘이 땅’을 모두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을 통치하려는 전투에 저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아르주나는 미래에 이룰 영적인 해탈보다는, 현재의 쾌락에 집착한다. 그의 혈육으로 상징되는 오감의 자극과 쾌락을 제거하기 주저한다. 감각을 통한 중독이 아르주나를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감각의 노예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는 그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해탈을 갈구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그의 오감을 자극하여 쾌락에 탐닉할 것이다. 아르주나는 영적인 상상력의 부족과 그것을 위해 자기혁신을 지속할 인내가 부족하다. 그에게 행복이란 지금 자신을 위로하는 자극적인 쾌락이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에게 신들조차 부러워하는 우주의 세 영역 지배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세 영역이란, 신들이 지배하는 하늘, 새들이 활동하는 대기, 그리고 동식물이 중력의 지배를 받는 땅이다. 그는 자기절제를 통해, 자신과 하나가 될, 이 우주를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삼매경으로 진입하여, 우주와 하나가 되는 해탈의 경험보다는, 자신의 감각과 감각의 중독에 탐닉할 것이다.

아르주나에게 악은. 오히려, 자신이 누리는 오감의 쾌락을 상징하는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들을 제거하는 싸움이다.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들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악으로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가바드기타> 제1권 36행

nihatya dhārtarāṣṭrān naḥ
니하트야 다르타라슈트란 나흐
kā prītiḥ syāj janārdana
카 프리티흐 스야즈 자나르다나pāpam evāśrayed asmān
파팜 아바수라에드 아스만
hatvaitān ātatāyinaḥ
하트바이탄 아타타위나흐

(직역)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인간을 동요시키는 자여!
그러므로 악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이 살인자들을 전멸시키라고(부추깁니다.)”

(번역)
“카우바라 왕국의 왕인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인간을 동요시키는 크리슈나여!
그러므로 이렇게 전열하여 전투를 준비는 하는 것은, 악이 우리에게 들어와 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 악이 우리를 전멸시키려는 우리의 친족들을 전멸시키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아주르나는 쾌락에 중독되어있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탐닉하고 타인의 아부를 통해 위안을 받고 이기적인 언행을 일삼고, 육체적인 쾌락이 최고의 선이다. 그에게 선이란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지고, 듣고,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런 생각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요가 수련에 들어선 사람에게 도전이란, 오감으로 경도된 육체와 정신을 가다듬과 제어하여. 그 익숙한 욕심으로부터 탈출하는 해탈이다. 인간은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자기-수련을 시작한 초보자는 오감을 통한 쾌락이 선이다.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허용되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아르주나는,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이 상징하는 쾌락을 제거하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가바드기타> 제1권 37행
tasmān nārhā vayaṁ hantuṁ
타스만 나르하 바얌 한툼
dhārtarāṣṭrān sva-bāndhavān
다르타라슈트란 스바반다반sva-janaṁ hi kathaṁ hatvā
스바자남 히 카르탐 하트바
sukhinaḥ syāma mādhava
수키나흐 스야마 마다바

(직역)
“그러므로, 우리는 살해하는 것이 정당화하지(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들은, 우리의 일부인 친족들입니다.
어떻게 실제로 우리의 일부인 백성들을 살해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오, 마두의 자손이여!”

(번역)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살해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르타라슈트라의 자손들은, 우리의 일부인 친족들입니다.
그들을 살해하는 행위는, 우리가 속한 백성을 스스로 전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살해한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하겠습니까? 마두의 자손인 크리슈나여!


아르주나는 자신의 과거 인연, 그 가운데에서도 쾌락을 가져다주는 감각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을 부인否認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걸머져라!” ‘자기부인’은 자신에게 익숙하여 당연한 것, 그리고 편해 중독된 것을 가려내어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기꺼이 목숨까지도 담보할 수 있는 자신만의 십자가를 기꺼이 걸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주나의 적은 저 들판에 선 카우바라 군대가 아니라, 자기부인을 통해 자기혁신을 두려워하는 과거의 자신이다. 과거의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고 핑계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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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는 사람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아드리아엔 브루웨르 (1605-1638) 유화, 1636, 46.4 cm x 36.8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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